싸움의 추억

이순락 (2012-03-09 11:49)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읽기에 앞서~] :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에 있었던 필자의 체험담입니다. 한편의 단편소설 읽는 기분으로 접해 주시길 바랍니다. ...................................................................................................... “학생요, 큰일 났심더. 밑에 동네논에서 종태 형이 깡패 두목과 싸우는데 두들겨 맞고 있어요. 그래서 학생 부르러 왔심더.”  “깡패 두목 카능거 보이까  글마가 치수라 카는 놈 아이가? ㅇㅇ도 2단 땄다고 똘만이들에게 자랑 한다 카는 놈 맞제?”  “예, 맞심더. 우옛끼나 빨리 가입시더. 종태형 애인이 학생 빨리 모셔오라고 막 울고 있어요.”  “그래, 알았다. 빨리 뛰어 가보자.”(내가 무슨 포도대장이라도 된단 말인가?!) 당시 나의 호칭은 ‘학생’이었다. 산동네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큰 동네인 본동에서조차도 대학생이란 거의 없었다.  동네가 비록 부산 시내에 있긴 했지만 워낙 낙후된 동네(당감동)였다. 뒷산에는 시립 화장터가 있고, 동네 한쪽에는 거대한 신발 공장(동양고무 등~)이 있으며, 판자 집으로 된 피난민촌과 공장 근로자들이 셋방살이로 붐비는 동네였기 때문이었다. 학생이라는 호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었고, 그 동네에 들어서면 동네사람 거의 모두가 나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었다. 검정색 대학생 교복(상의)을 입고 다녔던 계절에는 대학생 신분이 무슨 상징처럼 보여 졌으리라. 나를 부르러 온 꼬마는 우리 집에 자기 엄마와 세 들어 사는 열여섯 살 된 아이였다.  ‘종태’라는 청년은 경북 울진 출신으로 신발공장 조장직급이었고, 가슴 딱 벌어진 체구에 힘세기가 소문난 당찬 하숙생 총각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신발공장 다니는 전남 해남(養母의 고향)과 경북 울진 출신 총각들이 7~8명 하숙생으로 있었다. 그들은 일요일 같은 휴일이면 나로부터 소위 ‘싸움기술’(격투기로서 권투 글로브를 끼고 실전과 같은 싸움연습)을 배우는 재미와, 이웃 동네에 있는 3류 영화관에 가서 두 편씩 동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 것을 크나큰 낙으로 지냈었다. 싸움이 벌어진 곳은 아랫동네의 이른 봄 바싹 마른 논바닥이었다. 내가 그 싸움판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 내가 참견할 사이에 종태는 자기 여자 친구와 함께 황급히 도망쳐 빠져나갔다(?!). 나는 이름마저도 기분 나쁘게 들리는 ‘치수’란 동네 깡패 두목과 불가피하게 한판 붙게 된 것이었다. 녀석은 항상 똘마니 두셋은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녀석 이 혼자였던 게 나에게는 행운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나는 그 당시엔 정말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가히 펄펄 날다시피 하였다. 하루 평균 6시간 이상씩 줄넘기 등으로 권투에 심취했었다. 나 스스로가 무슨 중국 무협소설 같은데 나오는 대단한 무인처럼 착각할 정도였으니...  그 치수란 친구가 대뜸 “야, 이 x같은 새끼야, 니가 뭔데 지랄하노?”하면서 가차 없이 주먹이며 발길질로 난동을 부렸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실실 웃으면서 왼손바닥을 펼치고 든 상태에서 “야, 내는 x도 아이고, 별 볼일 없는 놈이다. 그러니까 그만해라. 알았제?”하였더니, 녀석은 아마 ‘재수 없게 뭐 이런 새끼가 있노?’ 식으로 생각했으리라. 당시 나의 몰골은 실제로 베트콩(?) 빼닮은 새카맣고, 그저 눈알만 반들거렸을 뿐이었으니(사람들은 나의 그러한 눈길을 대단히 무서워했다. 특히 내가 한번 씩 쏘아보면 잔뜩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거울을 마주하는 쉐도우 복싱 등, 권투의 특징이 눈 한번 깜짝할 수 없는 단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녀석이 보기엔 정말 가소로웠을 것이었다. 녀석이 흥분하여 울부짖듯 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니 내가 누군 줄 아나? 이 새끼가 죽을 라고 환장했나? 내 인테 기 오리능기가?” 하면서 씩씩 거렸다. “그래, 대충 안다. 니 뭐 동네 애들 데리고 있다면서? 아이고 무세라. 그라고 뭐 ㅇㅇ도 2단 땄다고 떠든다미?” 그는 계속해서 발길질과 주먹질을 마음 놓고 춤추듯이 휘둘렀다. 반면에 나는 오른 손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계속 왼손을 들고 부채질 하듯 피하고 고개를 젖히거나 허리를 꺾는 등 방어만 하면서 대응했다.  논 둑 넓은 길에는 아마 4~50명은 족히 관객(?)으로서 싸움 구경을 했었고, 또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아주 긴 시간으로 느껴졌지만 약 5분여 정도 지났으리라. 결국 녀석은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식식거리더니 논바닥의 자갈이며 돌덩이를 찾았다. 나는 다리야 날 살려라는 기분으로 잽싸게 20여 미터 정도 도망쳐 떨어져 나왔다. 녀석은 여전히 분통이 터지는 듯 돌팔매질을 해대며 “니 이 개새끼야, 때래 죽이뿐다. 야, 이 x할 놈아!”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나도 맞 고함쳤다. “야, 이 새끼야, 니 오늘은 종태 때문에 운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에 한 번만 더 걸리면 내 손에 반 죽는 줄 알아라.”  동네에서는 아무도 당할 자 없는 깡패두목에, 더구나 국기 ㅇㅇ도 공인 2단 땄다고 큰소리치면서 자랑하는 녀석이 얼마나 창피스럽고 자존심 상했겠는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대는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는데도 처치 못했으니... 이 당시의 동네 깡패 녀석들은 싸움판이 벌어졌다하면 유리병을 깨어 버석버석 씹으며 상대방 얼굴을 향해 내뱉듯이 불었고, 웃통을 벗은 채 깨어진 유리병 조각으로 가슴이며 배를 그어대면서 자해행위를 했었다. 어떤 녀석들은 아예 면도날로 팔뚝을 그어대는 경우도 있다. 그은 후 3~4초가 지나면 온몸과 팔에 선혈이 낭자하여 뚝뚝 흐르고, 보기가 끔찍한 것이다. 이런 짓거리들이 무슨 유행처럼 번졌던 것이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가끔씩 대할 때면 정말 불쾌해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었다. “야, 이 새끼야, 재수 없이 어디서 더러운 버릇이고?”하면서 손바닥으로 따귀를 세차게 친다. 거의 대부분 녀석들은 단 한방에 난동을 부리든 그 자리에 푹 거꾸러진다. “야, 이 새끼야, 니 내 얼굴 똑똑히 봐라. 내가 누군지 아나?”하면서. 억울하면 산동네 어디어디로 오느라고 우리 집을 알려준다. 결국은 녀석들이 “햄요, 잘못 했심더.”라고 빌도록 하는 것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웃기는 것은 학교의 같은 과 친구들이 종종 사람들이 운집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큰 소리로 떠들고 겁 없이 왈왈대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조용하게 묻는다. “아니, 김 형, 그런 곳에서 그렇게 설치다가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우얄라꼬 카능교?”하면 아주 태연하게 “뭐, 이 형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요.” “?!...(아이고! 미치겠네)”   녀석과 20여명 되는 동네 깡패들은(오늘날의 ‘조직폭력배’를 지칭) 신발공장 월급날이면 아예 공장 출입구에서 진을 치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그들의 수금일이기 때문이다. 박카스 수십 상자를 쌓아두고 퇴근해 나오는 2,000명은 족히 넘는 남녀공원들에게 무조건 한 병씩 안겨주고 돈을 받았던 것이다. 1병에 천 원 씩 받았었고, 당시 박카스 한 병 값은 아마 30원 ~50원 정도였으리라.  돈은 아예 큰 마대 자루를 준비하여 무조건 박카스 값을 넣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약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몰매로 타작을 당함은 물론이다. 이상하게도 경찰은 구경조차 할 수 없고, 회사 경비실에서도 너무도 당연한 행사처럼 방관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부터 우리 어머님(양모)께서 지시를 하셨다. 우리 집 하숙생들에게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퇴근 시, 지켰다가 데려오라는 분부셨다. 동네 깡패들에게는 나의 무서운(?) 존재가 이미 상당부분 알려져 있어서 우리 집 하숙생들에게는 사실 거의 ‘수금’을 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어느 날부터는 내가 매번 지키며 한데 모아 데리고 왔으니. 녀석들이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손해 볼 수 있음을 감안했으리라. 나에 대한 소문은 대충 이랬다.  모 대학 법대 다니는 대학생인데 권투를 얼마나 잘 하는지 체육관에서 알아주는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이었다. 조금은 과장된 것이겠지만 거의 진실인 것처럼 소문은 그렇게 퍼졌던 것이었다. 그 정도의 소문은 두목이라는 녀석도 사실 알고 있었다고 했었다. 그런 차중에 싸움판이 벌어졌고, 내가 맞대응을 안했던 싸움이 너무 어이없고 싱겁게 끝났던 것이었다. 그런 후 2주일이 지난 어느 일요일 날 덩치 좋은 두 녀석과 함께 녀석이 찾아왔었다. 종태 빽(?)을 믿고서. “학생요, 몰라 뵈서 정말 죄송 합니더. 그날 술도 한잔 묵었고, 나는 마 학생을 깔래보고 그랬잖소? 만난 김에 마 같이 한 잔 하러 갑시더. 앞으로 우리 서로 잘해보지 않겠소?” “그렇지요. 치수씨가 아무래도 술만 안마셨으면 나 같은 게 택도 없지요.” 이런 식으로 녀석의 똘마니들 앞에서 자존심도 세워주면서 화해를 했었던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우리 집 하숙생들은 그야말로 주인집 ‘학생 덕택’에 월급날도, 영화관 출입도 대단히 편해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니까. 나의 싸움기술이란 단지 권투를 조금 익힌 것뿐이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아마추어 복싱(권투)이 가장 강한 곳이 부산이었고, 부산에서는 내가 다녔던 대학 체육학과 복싱부가 최강의 선수들(김 현치 등)이었다. 물론 나는 체육학과 학생도 아니었고, 선수출신도 아니었다. 다만 부산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복싱전문체육관에 적을 두고 운동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나 스스로 권투가 좋아 열심히 익혔던 것뿐이었다. 집 앞 작은 산 숲속에 나만의 수련 도장을 만들기도 했었다. 권투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은 누가 뭐래도 줄넘기다. 당시엔 나의 줄넘기 실력이 무슨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고 할 정도였었다. 주먹 휘두르는 것은 40%정도이고 줄넘기가 60%를 차지하는 것이 권투이다. 권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스피드’이다(특히 아마추어 복싱의 경우). 그리고 “최대의 공격은 최고의 방어”라는 수칙이 있다. 누구나 권투라는 운동을 열심히 하다보면 맨주먹으로는 1초에 4~5회 타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연습 시에 손바닥 안에 철도 침목 못 종류의 쇠붙이를 붕대로 감아 연마한 결과이다. 실제로 복잡한 열차 같은 좁은 공간에서 주먹다짐이 있을 경우엔 대개 십 수 초 이내에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다. 아주 위험하다는 판단이 되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급소치기가 요구된다. 여하튼 나는 권투를 취미삼아 즐겼었고, 지금도 샌드백이 달려있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번 두들겨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권투 때문에 류마치스 관절염을 앓아 부모님께 무척 걱정도 많이 끼쳤었다. 지금은 경로우대를 받을 나이지만, 만약 젊음이 다시 올 수 있다면 역시 권투에 심취하게 되리라. 지난달 신문에서 서울대생 두 명이 프로복싱에 입문했다는 보도를 보았었다. 나의 젊은 날이 향수처럼 그리워진다.(201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