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박정철 (2013-11-02 08: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셨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3)     바라본다는 것은 좋다. 바다를 바라보고, 꽃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얻게 되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보고 또 봐도 돌아서면 보고 있다. 늦가을 들녘,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추수를 끝낸 그 자리를 바라보며 이삭이라도 주워 담고픈 마음이다. 온 몸에 햇살을 받고 서 있지는 않지만 서산에 지는 붉은 태양빛에 부스러기 몇 줄 글귀라도 허락받지 않을까 싶다.   논들이 거의 추수를 끝낸 모습이 말쑥하다. 군대 입대하기 전날, 강원도 어느 이발소에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짧게 깎았었는데, 오늘 바라보는 그 들녘이 마치 그때의 내 모습 같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로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더 어색해진 웃음을 지어보였었는데, 황금물결을 이루며 장엄하기조차 하던 그 가을 들녘이 그때를 떠올려주고 있다. 그렇게 가기 싫던 군대를 제대한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다.   늦가을 들녘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꽤 크다. 울면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둔 수고한 농부들이 얻게 되는 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자연을 벗 삼아 글이라도 긁적이는 시골 목회자에게 이 들녘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너무나 과분하다. 이 큰 은혜를 아무런 수고 없이 받아도 되는지 송구스럽기조차 하다. 해산의 수고를 다한 들녘이 그저 평화롭다. 이른 봄부터 지금까지 그 수고로움이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이제 모든 것을 끝내고 편히 쉬는 모습이 그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 없다. 착하고 충성된 논들이 주인이 즐거움에 참여하는 듯 그 넉넉함이 좋아 보인다.   얼마나 지나버렸을까. 어느 새 그 들녘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너도 올해 많이 거두었느냐”고, “너도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수 있겠느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