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화육제별사(化肉祭別詞) - 성금요일에 읽는 시 한편

김진철 (2014-04-17 06:30)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70년대 우리의 고민과 우리가 부른 찬송, 우리가 드린 기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미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의 화육제별사(化肉祭別詞)...... 좋은 시절 속에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이 서러워서 성금요일에 읽고 나누고 싶어 일부만 옮겨 봅니다. 화육제별사(化肉祭別詞) -고정희 1. 성금요일 오후 친구여 언제나 그랬지 사월, 고난 주간 성금요일 오후에 가장 부끄러운 이 땅의 구호와 맞서 있었지 이날의 성전(聖戰)을 위하여 수유리의 하늘 아래선 마태수난곡 혹은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이 성난 우리의 맥(脈)을 가만가만 짚어내리고 수유리에 잠든 혼령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면 어디선가 순례자의 봇물 같은 슬픔이 밀려와 사월의 잔디 위에 바람으로 누웠지 그때 우리는 검은 제의(祭衣)로 몸을 감싸고 주의 기도문 마지막을 암송하였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 중세의 어둠은 내려와 길게 드러누웠지 오후 세시를 향한 골짜기에서 단식보다 완강한 침묵에 인도되어 우리는 몇 번이고 기도문을 암송했어 2. 우리를 고독한 자이게 하소서 3.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친구여 야훼는 언제나 침묵하셨지 언제까지나 기다림이신 야훼 ....... 우리는 다시 사도신경을 외우며 삼삼오오 어깨둥지를 틀고 오후 세시의 수유리 골짜기를 오르고 있었어 삼각산 숲정이의 모든 밑둥우리에서 나지막한 오열이 부풀고 있었어 ....... 어깨둥지의 시작과 끝에서 개편찬송가 삼백육십팔장이 들려왔어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아니오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주 뜻이 이루 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   ........ 6. 기(旗)를 찢으시다 제단 위에 선 스승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면도칼이 번쩍이고 있었지 그는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형제들이여 이제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쪽을 보십시오 학문의 자유와 양심을 상징하는 여러분의 校旗가 여기 서 있습니다 36년 전에 세워진 이 깃발, 평화스러운 듯 서 있는 이 깃발, 이것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진리의 사도입니까? 우리가 과연 양심의 증인입니까? 우리가 과연 평화의 다리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와 ‘아니오’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공의’의 확신을 잃어버렸고 ‘옳음’의 투쟁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벌레의 집이 되었고 우리의 몸은 사탄의 자궁이 되었으며 우리의 지붕은 악마의 城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두 비겁해졌습니다 그 상징으로 우리 기를 찢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회복되는 날 우리의 학문이 제 몫을 하는 날 우리의 깃발도 아물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각자의 거울로 삼으십시오    스승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그는 교기를 깊숙이 찢었지 아아 36년 동안 온전했던 그 깃발, ‘임마누엘’(‘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다’의 뜻)이라 쓰인 히브리 글자가 삼팔선처럼 분절되었다    더 이상의 아무 말도 필요 없던 그날 병적인 후련함만이 우리를 제압하던 그날 창밖은 찬란한 봄볕이 내리고 상수리나무와 싸이프러스가 언뜻언뜻 흔들려 울던 그날 우리는 함께 일어나 서로를 부축하며 찢어진 깃발과 사내를 묻으러 성금요일 오후의 산으로 향했지 베르디가 낮게낮게 진혹곡을 풀었지    아누스 데이 이제 가라 가거든 오지 마라 인파라디즘 7. 연좌기도회 8. 수유리의 바람 9. 다시 수유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