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리그의 파이터(6)

이순락 (2015-04-19 18:10)

(2) 여름도 거의 다 간 듯한 9월 초순경 어느 일요일 이었다. D-데이가 온 것이다. 작전대로 영화관에 가기로 하여 점심을 든든히 챙겨먹고 나섰다. “오늘은 영화구경은 아예 안하는 걸로 하여야 한다. 잘하면 앞으로 월급날 돈 뺏기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시 울진 출신의 종태와 해남출신의 상철이 형(최연장자 26세) 이외 하숙생들에게 ‘예’하는 경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상철이 형은 사실 운동 자체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 과묵한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엔 해남사람이 하나 더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혼자된 입장에 있기도 했다.) 그래서 운동을 할 때 종태씨가 있어도 나는 통상 ‘해라’는 식의 말버릇이 통용되었던 것이다. 오늘 출행은 모두 여섯 명 이었다. 종태, 동식, 상훈, 원길, 관수 그리고 나. 그런데 동네 깡패 녀석들은 대략 15명 정도라고 했다. 그렇지만 모두 모이는 날은 공장에 월급날 그들이 수금(?)하는 날을 빼면 대개 7~8명이 어울려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의 계산 대로면 그들과 맞짱을 떠도 되겠다는 것이다. 숫자적으로 한 둘이 부족한 우리였지만. 모두가 이상할 정도로 기분들이 들뜬 듯이 대단히 좋아보였다. 싸움하러 가는 놈들인데 이건 마치 산이나 들에 야유회 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들이었다. 그만큼 나를 믿고 또한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제일 어린 녀석인 동식이가 휘파람으로 ‘빨강구두 아가씨’를 불렀다. 나도 공연히 기분이 좋아서 동식이 따라 휘파람을 불렀다. 예의 그 부암동 고갯길이 저만치서 보였다. 동식이와 상훈이가 앞서 가도록 했다. 사실 저들이 앞장서 가야만 자기들끼리 담배도 피우면서 자유로울 것이니까... 특히 동식이는 오늘 깡패 녀석들에게 미끼로 정한 것이다. 그것도 깡패 녀석들의 두목이라는 치수라는 놈이나 혹은 부두목 석찬이란 놈을 상대로 하는 중책을 맡긴 것이다. 그 한참 뒤에 씨름에 일가견이 있는 원길이와 그의 단짝인 관수가 뒤 따르도록 했다. 종태씨와 나는 맨 뒤편에서 어슬렁거리듯 가기로 했고. 종태씨는 자칭 ‘학생의 보디가드’(?!)라고 하면서 나와 동행을 원했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누가 누구의 보디가드인데? 라는 피식 웃는 질문을 속으로 하면서. 내가 종태씨에게 가늘게 뜬 눈으로 째려보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김 형, 오늘 잘못되면 내가 놈들에게 실컨 두들겨 맞는 꼴 보고 혼자 토사이 놓는거(도망치기) 아입니까?” 했더니 풀쩍 뛰면서 맞받아쳤다. “에이, 그런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마소. 글마들 알고 보면 X도 아이고요. 그라고 또 내가 의리 없이 토끼는 그런 일은 없을낌다. 두고 보소.”하면서 큰 소리쳤다. 내가 시치미 떼면서 말했다. “사람 속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니까 두고 보면 알겠제.”했다. 듣고 있던 종태씨가 “아따 참말로 학생요, 정 떨어지는 소리 좀 고마하소.” 진실로 화를 내면서 소릴 질렀다. “아이고, 미안 하요. 농담했는데 뭐 캅니까?”라고 하면서 무마를 시켰다. 앞서 가던 동식이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동식이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야, 이 깡패 새끼들아, 이 동식이가 옛날 동식이가 아잉기라. 그라고 오늘은 우리 학생 형님이 기시니까 너그들 작살나는 줄 알아라.’ 그랬다. 마음은 뛰어 가고 싶었지만 애써 태연한 듯이 걸었다. 종태씨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김 형, 제발 그 담배 좀 끊으면 좀 좋겠오? 백해무익한 거 와 자꾸 피우고 몸 상하는지 모르겠네. 노다지 캐엑 캑 거리면서 가래침이나 내뱉고...” “예, 알겠심더. 학생이야 운동 때문에 숨 가빠진다고 안 피우겠지만, 우리 같은 공돌이는 담배도 피우고 소주도 한 잔씩 해야 속이 풀리는 기라요. 얏튼 미안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담배를 연신 빨아대면서 걸었다. 아마 속으로 좀 초조해지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더 뭐라고 할 입장이 못 되었다. (3) 동식이가 씩씩거리며 덩치 큰 녀석에게 대들고 있었다. 아마 동식이의 뒤에 자기편이며 내가 있다는 것 그 믿음의 힘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 괭이아래 쥐 꼴보다 더 했을 것이리라. 그 큰 녀석이 담배를 비뚤게 씹듯이 입에 문채로 동식이에게 주먹질을 한방 올렸다. 잽싸게 잘 피했지만 빗나간 주먹에 얼굴 관자놀이 쪽이 약간 붉게 충혈된 것 같았다. “말로하소. 시발. 나같이 약한 놈에게 손대는 것 보니 형씨도 뭐 X도 아잉거 같네요.”하니까 그 큰 녀석이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피우든 담배는 내뱉고 또 주먹질을 했다. "이 X만한 새끼가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유분수지, 내 참 미치겠네.“하면서. 아뿔사 싶었지만 동식이는 용케 잘 피했다. 그렇지만 숨결이 가빠 보였다. “저기 우리 대학생 형님 오시면 모지리 확 세리 뭉케뿔 낀데 지랄하고 있네.” “뭐라고 너그 대학생 형님이라고? 야, 이새끼야, X같은 소리하지 말아라. 그런 학비리(학생)는 한 도라꾸와도 조지뿌린다. 아나? 이새끼야.”고 고함쳤다. 그러자 7~8명 되어 보이는 깡패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와 빙 둘러서기 직전이었다. 아마 같이 있는 우리 청년들에게 떼거리로 덤빌 작정인 것 같았다.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관수가 우릴 보았는지 그 덩치 큰 녀석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발걸이로 넘어뜨렸다. “이 시부럴놈 새끼들이 대충해야 참고 있지. X도 아인 새끼들이 지랄하고 있네.”하면서 옆에서 덤벼들려던 한 녀석에게도 보기 좋게 훅을 날렸다. 녀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 녀석은 관수의 단 한방에 고꾸라진 것이었다. 그런 차에 원길이도 상훈이도 한판 붙어보자는 자세를 취했다. 그 덩치 큰 녀석이 거품 흘리듯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일어나 “X쌔끼들 다 때래 지긴다(죽인다).”고 흥분하면서 입고 있던 잠바 속에 감추어 두었던 곤봉 하나를 들고 후려칠 자세였다. 관수가 군용 탄띠를 번개같이 풀어 들고 대응자세로 들어갔다. ‘아이고, 다행이네. 내 저런 놈들은 원래 저럴 줄 알았제’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찰나였다. 종태가 호통을 치며 뛰어 갔다. “야 이 비겁한 사나새끼야. 곤봉 들고 지랄하고 있네. 그거 두고 한판 붙자.”고 소릴 질렀다. 내가 말했다. “형씨들 보소. 치우소. 이게 무슨 꼴들이요? 너그들도 내 말 들어라. 스돕(톱)해라.” 하는데 “야, 이 X만한 깜상 새끼야. 니가 학비리가?” “어허, 형씨, 말이 듣기가 좀 그렇네. 분통 터지면 우리 깨끗하게 1 : 1로 맞장 뜨까?” “그래, 조오타. 한 판 하자.”하더니 녀석이 점퍼며 윗도리를 몽땅 벗고 덤벼들 기세였다. 물론 들고 있던 곤봉도 내 팽개치고서. 난 속으로 우스웠다. ‘이 자식, 니 오늘 진짜 임자 만났다. 일마가 보니 부두목이라는 석찬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그런 싸움은 나에겐 정말이지 식은 죽 먹기였다. 즉 스파링 상대로서 잽이(상대)가 너무 안 될 정도였다. 비록 제 아무리 힘쓰는 깡패 부두목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말이다. 동식이도, 상훈이와 관수도, 종태도 모두들 깡패 녀석들과 대치된 상태에서 좋은 구경이라도 하듯이 빙 둘러 섰다. 그런데 종태가 식식거리며 나를 가로막고 나섰다. “학생요, 이런 X도 아인놈에게 아까운 주먹 쓸 필요 없고요. 대신 내가 붙을께요.” 하면서 눈을 찡긋했다. 그러나, 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별로 가늘지 않은 눈을 옆으로 치떠 보며 “김 형, 당신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제발 구경이나 하소. 단 몇 초이니 두고 보소.”했다. 그 덩치 큰 녀석은 이런 말들을 듣고 고개를 젖히며 가소롭다는 듯이 히죽이 누런 잇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말했다. “자, 됐나? 시작하까?” “그래, 좋다.”하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꽤 신사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곤봉은 들지 않았다. 녀석은 “너 이 새끼, 말라비틀어진 피래미 새끼 같은 새끼네, 이거 완전 베트콩 상 아이가. 오늘 나 인테 죽어봐라.”하면서 주먹질을 해댔다. 그러면서 되잖은 발길질도 열심히 했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베트콩’이라는 말에 속이 뒤집혔지만 참았다. 사실 나 자신이 당시의 모습이 맹호부대원들에게 생포 당한 베트콩 상이었다. 그런 베트콩처럼 새카맣고 비쩍 마른 몸매였으니. (계속)